ESG와 기업 생태계의 변화

 

 

 

 

[기업에 대한 ESG의 도전]

최근 들어 전세계적으로 ESG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드높다. ESG는 잘 알려진대로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영문 앞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기업들이 환경을 해치지 않고,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주지 않으며, 지배구조를 건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요구는 그간 일반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사회에서 논의 되어 왔으며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ESG가 이전의 사회적 책임 혹은 윤리적 책임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문제를 자본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투자와 연계시켰다는 점이다.
영국을 필두로 스웨덴, 독일, 캐나다, 벨기에, 프랑스 등이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ESG 정보 공시 의무 제도를 도입했다. UN 역시 2006년 출범한 유엔책임투자 원칙UNPRI을 통해 ESG를 고려한 사회책임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환경에 대한 책임을 무시했던 트럼프 정부에 이어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서 ESG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월가의 주요 투자사와 펀드들이 ESG를 강조하는 지속가능 투자에 나섰다. 한국도 올초 금융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2025년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부터 ESG 공시 의무화가 도입되며, 2030년부터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된다.
위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ESG는 기업들에 대한 일종의 민간 차원의 규제 혹은 제도적 환경으로부터의 규범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의 위험은 계속 높아지고, 경제적 양극화도 심화될 뿐 아니라, 시장 불확실성도 계속 늘어나는 현실의 절박함과 위기감 속에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손잡고, 자본시장에 압력을 행사해서 기업들에게 보다 책임감있고 지속가능한 미래지향 경영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업들의 개별적이고, 자발적인 인식의 변화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쉽지 않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감시와 강제(?!)에 의해서라도 바꾸어야겠다는 결의의 표출이라 할 수도 있다.

 

[ESG 등장의 배경]

가뜩이나 디지털 전환과 팬데믹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ESG 중심의 최근 급격한 기업환경 변화를 기업들은 부담 증가로 느낄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규제나 규범적 압력으로 여겨 기업들이 마지못해 ESG를 수용하게 되면, 그것은 이윤추구 경쟁에서 족쇄처럼 여겨지고 결국 상징적 혹은 표면적으로만 순응하게 될 수 있다. 기업조직에 대한 신제도주의 관점에서는 기업조직의 이러한 대응을 환경의 요구에 대한 기업조직의 어긋남decoupling이라고 부른다.1 특히 이러한 대응은 기업조직에대한 제도적 환경의 요구와 규제가 강제적일 때 더 가능성이 커진다. 그 최종 결과는 ESG의 의도 만큼 지속가능성이 증가하지 못하거나 기업들의 불만이 늘어나는 등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기업의 이해관심을 관계적으로 좁고, 시간적으로 짧게 이해한 결과이다. 기업의 이해관심을 관계적, 시간적으로 좀더 넓게 확장해서 보면 인식은 달라진다. 이 글에서는 기업에 대한 ESG 요구를 수동적, 방어적 차원의 비용이 아닌 능동적, 적극적인 투자로 볼 수 있는 또한 보아야 할 근거를 기업에 대한 생태학적 이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혁신적 기술과 우수한 제품, 서비스로 경쟁기업을 앞서 시장을 선점하고 확장해감으로써 높은 이윤을 올려 주주와 구성원들에게 많은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모든 기업의 이해관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20세기말 이후 시장의 확대와 경영의 발전에 따라 기업 이해관심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수들이 등장했다. 기술적으로 혁신의 범위가 지역적 클러스터로부터 국가적 시스템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기업의 혁신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요소들이 계속 늘고 있다. 예컨대 공급계약이나 전략적 제휴 등으로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기업들이 늘어날 뿐 아니라, 혁신을 담당할 연구개발 인력들이 지역사회나 국가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원활히 공급되어야 한다. 그 결과 이제는 기업의 이해관계를 기업 경계 안으로 한정해서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업생태계의 관점]

이처럼 기업의 이해관계 범위가 확장되고, 경쟁의 단위가 개별 기업이 아닌 기업간 협력 네트워크로 확대된 것을 무어James Moore, 이안시티Marco Iansiti 등 경영전략가들은 기업의 경쟁과 생존이 ‘기업생태계’에 의존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2 기업생태계의 중요성이 높아진 것은 이른바 지식, 정보, 기술, 시장에서의 융합convergence 경향이 전례없이 높아진데 기인한 바가 크다. 개별 기업 단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혁신이 여러 분야에 걸쳐 융복합적으로 진행되고, 기술발전으로 전혀 무관했던 분야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기회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들은 20세기 중후반 빠른 성장과 인수합병 등의 경험을 통해 거대조직의 병폐인 비효율 증가, 시장대응과 의사결정 속도의 둔화, 기업내 거래비용 증가의 문제를 피하고자 기업 자체의 거대화는 피하고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동시에 외부와의 연결을 강화한 결과 기업생태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기업생태계가 주로 기업의 투입input과 중간thruput 단계에서 경쟁을 넘어선 협력coopetition에 초점을 맞춘 반면, ESG는 기업의 산출output이 시장을 넘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협력적 기업생태계에 대한 투자가 보다 넓은 범위에서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이더라도,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 사회, 지배구조 측면에까지 기업이 투자해야 할 이유나 근거는 무엇일까? 거대 투자자들의 요구와 압력에 호응하기 위해서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그것 뿐이라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최소의 부담이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전략적 시야를 기업생태계까지 확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전체 사회와 환경까지 포함하도록 넓고 멀리 보게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경제적 가치만이 아닌 환경적, 사회적, 윤리적 가치가 경쟁 과정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발생하는 개인과 전체 간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개별 기업이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하더라도 이를 무시하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린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공동의 가치는 개별 기업 간의 경쟁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 문제의 해결책이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아닌 자발적 동의에 기반할 수 있을까?

 

[ESG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필요]

해결의 실마리는 게임이론의 오랜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악셀로드Robert Axelrod의 “협동의 진화”에서 찾을 수 있다.3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는 죄수들이 자신의 이해관심을 앞세워 궁극적으로는 가장 많은 공동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협력을 포기하고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배신을 선택한 결과 공동의 손해를보게 된다. 이에 대해 악셀로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회성이 아닌 연속된 게임에서 상대방의 호의(협력)에 호의(협력)으로 대응하고, 상대방의 배신은 응징(배신)하는 맞대응tit-for-tat 전략을 취하면 배신보다 협력이 궁극적으로는 우세해진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했다.
이를 토대로 악셀로드는 맹목적 협력의 선호는 맹목적 배신을 이길 수 없지만, 조건부로 협력하는 맞대응 전략은 모두에게 손해를 가져오는 맹목적 배신을 이기고 협력이 우세한 전략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런데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나 악셀로드의 시뮬레이션에서는 미리 상대방의 전략을 알 수 없지만 만약 게임에서 참여자들이 상대방의 전략을 미리 알 수 있게 된다면 문제는 보다 빠르고 쉽게 해결된다.
현실에서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의 전략을 드러내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체성identity’과 ‘명성reputation’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게임 참여자의 전략을 협력 대배신이 아닌 공유가치 추구 대 맹목적 이윤추구로 바꾸고 공유가치 추구가 이윤추구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한다면, 동시에 참여자 전략이 각자의 정체성 인증을 거쳐 다른 참여자들에게 드러나도록 한다면 우리는 보다 적은 시간과 노력, 비용을 들이면서도 맹목적 이익 추구로부터 공유가치를 함께 추구하도록 게임을 바꿀 수 있다.
문제는 맹목적 이윤추구가 공유가치 추구를 압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쟁에서 서로 다른 전략이 서로 맞부딪칠 때 그 결과를 정하는 규칙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기능주의와 구성주의 관점을 구별할 수 있다. 기능주의란 경쟁에서 서로 다른 전략 간의 우위를 기능적 성과를 중심으로 정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성능이 더 우월하거나 더 저렴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이기는 것이 그 예이다. 그에 비해 구성주의는 경쟁에서 서로 다른 전략 간의 우위를 사람들이 선호하는 기준에 따라 정한다. 시장에서 소비자나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기준에 보다 적합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이기는 것이다.
조직간 경쟁에 대한 탁월한 이론적 모형을 제공한 조직생태학의 최근 이론적 혁신은 경쟁에 대한 구성주의적 이론화를 가능케 한다.4 애초에 조직생태학은 환경이 제공하는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조직 간의 경쟁이 환경에 대한 적합도fitness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의 이론적 혁신을 거치면서 이러한 기능주의적 주장은 보다 구성주의적 주장으로 대체되었다. 혁신된 이론에 따르면 조직의 적합도는 시장의 청중audience에 대한 매력appeal로 정해진다. 시장의 청중이란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평가하는 소비자, 투자자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시장의 청중들은 저렴하고 튼튼하며 편리한 제품만을 선호하지 않고, 생산자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가치를 중요시 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윤리적 소비나 임팩트 투자 등이 각광을 받는 것도 바로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변화의 배경으로는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나타난 물질주의로부터 탈물질주의로의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21세기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기업들의 과도한 탐욕에 대한 비판, 그리고 경제적 양극화와 기후변화에 따른 지속가능성 위기에 대한 위기의식 등을 들 수 있다.
20세기초 대호황시대의 미국에서 전례 없는 경제 성장과 거침없는 욕망의 표출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와 공유가치의 붕괴를 낳고 최종적으로 1930년대 대공황과함께 막을 내렸다. 최근의 글로벌 금융자본의 팽창과 디지털 기술의 눈부실 발전 속에서 한 세기 전과 유사한 양극화와 개인화의 병폐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업경영에서 ESG에 대한 최근의 강조는 지난 100년간의 교훈을 토대로 모두가 살만한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데 힘을 모으자는 거대한 흐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정치학자 퍼트남Robert Putnam의 표현대로 양극화로부터 공동 번영으로의 새로운 반전upswing을 가져올 수 있으려면 기업들이 새롭게 변화한 기업의 생태계에 대한 적극적 인식과 동조, 참여가 필요하다.5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