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가치 실현의 필요성과 방향

 

 

 

왜 지금 사회적 가치를 말하는가?

‘사회적 가치’를 정립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단순히 공공기관이나 기업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와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가 찬탄할 수준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정치에서의 성취를 기반으로 최근에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코로나 19 상황에서는 ‘K 방역’이 전 세계의 모델이 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요체인 시민의식, 참여, 투명성, 개방성, 창의성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나는 성취의 이면에는 어둡고 짙은 그늘이 존재하고 있다. 전 세계 국가 중 자살률 1위, 0.97로 떨어진 세계 최저 출산율, 오랫동안 세계 1~2위를 다투는 노동시간과 산업재해, 교통사고 발생 건수,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인 공공기관의 공공성 (서울대 장덕진 교수) 등 발전의 이면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이 있다. 이런 그늘을 거두어내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와 국가는 더 이상의 성취를,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성취는 빈곤타파를 위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한 축을 차지하고, 이를 위한 억압적 동원체제와 분단을 빌미로 유지됐던 군사독재체제의 민주화라는 다른 한 축을 차지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엔진에 의해 이끌려진 대한민국의 발전은 일견 성공적으로 달성되어왔다. 그러나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적 참사와 집단 간의 폭력적 갈등은 우리 사회를 수십 년간 이끌어온 정치와 경제 분야 지배집단의 의식과 지배방식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무한책임이 있는 ‘국가의 무능과 부재’를 드러낸 사건이며, 연간 2천여 명이 산업재해로 죽고 있는 현실은 아직도 우리 경제의 운영원리와 방식 안에 ‘안전’과 ‘생명’의 자리가 좁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10년간 출산정책에 150조를 쏟아부었는데도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노인과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신뢰의 부재’ 때문이다. 시민의식을 따라오지 못하는 정치, 성장과 물질 우선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있는 경제,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해 ‘이웃과 공동체’가 사라져버린 현실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의 실현이 우리 사회의 규범과 방향으로 제안된 배경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시민과 기업, 문화예술 등을 보유하며 세계 최고의 성취를 이룬 우리 사회가, 다른 한편으로 최악의 불평등과 세계 최고 수준의 불안사회라는 심각한 부조화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제도화 노력

아무리 좋은 정책도 지속가능성을 가지려면 입법을 통해 제도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법과 제도, 정책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선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 실현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의원 시절이던 2014년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사회적 가치 기본법>)을 발의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이 법안은 사회적 가치 실현을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로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생명과 안전,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배려와 상생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법안의 시작은 2012년부터였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불러올 가치와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의원실과 민간의 전문가들이 함께 토론을 계속했다. 마침 영국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등에서도 ‘사회적 가치’의 실현에 관한 법, 제도, 정책이 속속 만들어지고, 현장에서도 다양한 차원의 실천이 일어나고 있었다. EU에서는 ‘사회적 가치 가이드라인Social Value Guideline’이 이미 적용되고 있었고, 영국에서도 영국 현실에 조응하는 ‘사회적 가치 기본법Social Value Act’ 제정 등의 제도화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논의와 움직임을 참조하면서 2013년부터 한국 현실에 맞는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법제화가 추진됐고, 오랜 준비의 결과물로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법안이 공공기관을 규율하는 법안으로 먼저 준비된 이유는, 사회적 가치를 가장 먼저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주체가 바로 공공성 실현이 존재 이유인 정부의 각급 기관, 공공기관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먹는 것, 입는 것부터 에너지, 육상과 항공, 교통, 건설, 의료, 문화예술 등 국민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분야에 관여하고 있으며,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을 포함하면 국가 예산보다 1.54배가 많은 연간 641조 5천억 원이라는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임직원 수만 해도 338개 기관에 32만 4천 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며, 일부의 경우 법률에 따라 막강한 행정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을 포함하는 공공부문은 존재 이유 자체가 국민의 편익을 증진하고 사회발전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성 실현을 그 사명으로 가진다. 따라서 국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이 먼저 사회적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사회적 가치를 민간기업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는 견인차가 되도록 만들어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사회적 가치 기본법>안은 이처럼 사회 전반의 판단 기준이 되는 가치의 재설정과 행동 또는 실천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쳐보려는 중요한 목표를 가지고 입법이 추진되었다.
사회적 영향이 큰 정책과 제도일수록 입법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4년 발의됐던 <사회적 가치 기본법>안은 19대 국회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고, 김경수, 박광온 의원 등에 의해 재 발의된 20대 국회에서도 논의 테이블에 올라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라는 단어와 개념에 대한 정파적이고 이념적인 대립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법 제정이 지체되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법안의 첫 발의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2월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가치 중심 정부’임을 선언했고, 정부 혁신의 핵심원리로 사회적 가치 실현을 담아냈다. 이를 계기로 대부분 공공기관에 사회적 가치 실현 담당 부서가 신설, 또는 강화되었으며, 각급 정부 기관과 공공기관 평가 기준에 사회적 가치 실현 배점 비율이 큰 폭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2020년 2월에는 범정부 차원의 실천전략과 실현방안을 담은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공공부문의 추진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회적 가치와 기업

우리나라 기업은 경제성장의 견인차였으며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도전적이고 헌신적인 기업가들이 짧은 시간 내에 세계 수준의 기업을 여럿 일구어냈고, 국민의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국가의 조직적인 지원,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정책에 의한 노동자들의 역할, 범국민적 응원과 지원도 큰 역할을 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민간기업은 더 많은 수익창출을 통해 더 많은 고용을 실현하고 더 많은 세금을 냄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수익창출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과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직이기도 하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법적, 제도적인 지원, 토지나 전기, 물 등 유무형의 공공재, 공유재를 지원받거나 권한을 위임받아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업은 사회적 공기公器라고 할 수 있으며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기업가나 소유자들의 권리와 최대한의 이익추구를 보장해야 하지만,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측정해서 그에 맞는 사회적 책임 역시 동시에 부과하는 것이 합당하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보다 경제가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 오늘날에는, 기업 스스로 기업의 본질에 대해, 사회적 역할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유익을 창출할 수 있을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 실현은 기업의 사회책임CSR과 공유가치창출CSV을 넘어서 기업의 존재 이유와 사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가치 논의의 바람직한 방향

사회적 가치의 실현이 세계적 추세이자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향전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사회적 가치 실현을 특정 정부의 의제로 보거나, 일부 공공기관을 규율하는 법 또는 정책 수준으로만 보는 기능적이고 제한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는 우리가 어떻게 더욱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지켜온 전통적이고 관행화된 가치와 사회적 양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제안한 의제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촉발된 전 세계적이며 지구적인 위기상황에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주는 교훈은 전 세계가 기존의 체제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경제가 마비되고, 그동안 모른척했던 인간사회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생활방식, 생태와 기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 공공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깨달음, 협동과 연대, 나눔이라는 신뢰 자본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만이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지구와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인류가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코로나 19가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 인류가 위기 앞에 놓인 지금이야말로 정부를 비롯한 공공부문, 민간기업, 시민 모두가 새로운 삶의 형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찾아 나가는 일에 함께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문화운동가이자 종교인이기도 했던 존 러스킨의 책,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는 앞으로 우리가 사회적 가치를 논의할 때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깊은 교훈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노동자에 관한 내용에 기반을 두고 쓴 이 책에서 러스킨은, 사람 – 특히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은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각기 다른 시간에 도착한 일꾼에게 같은 금액의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공정과 공평에 대해, 진정한 사회적 가치 실현의 원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아침 제시간에 온 일꾼은 온종일 일을 했으니, 느지막이 포도원에 와서 일한 일꾼에게도 똑같은 임금을 주는 주인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는 공정과 평등에 대해 따졌을 것이다. 따지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스킨은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하면서, 인간에 대한,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와 배려가 경제의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경제’를 주장하고 있다. 러스킨은 ’늦게 온 이 사람‘이 그 날의 인력시장에서 바로 팔려나가지 못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찍온 사람에게나 늦게 온 사람에게나 일용할 양식은 기본이고, 내일의 일과 삶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과 휴식,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주인에게도 이롭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일찍 온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나중에 온 사람도 될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사회적 가치는 비교하는 것도, 상대화 시키는 일도 아니다. 우리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가장 좋은 원칙과 방법을 주체적으로 찾아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어 누구를 향해 말을 하는 것이 좋은가를 고민할 때는 그 중의 가장 약한 사람을 보면서 이야기하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의 약자들, 늦게 온 사람들, 늦게 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지가 사회적 가치 논의의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