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가치와 노동조합

 

 

 

 

최근 들어 우리 사회의 각계에서 더불어 사는 공생과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는 신선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어 반갑다. 여러 대기업에서 ‘사회적 가치’와 ‘기업시민’과 같은 새로운 경영철학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변화의 흐름에 앞장서고 있다. 예를 들어, SK그룹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동시적 창출을 의미하는
DBLDouble Bottom Line 사업모델을 추구하며 경제발전과 더불어 사회와의 동반성장을 해나갈 것을 공식화하고 있다, 포스코에서도 2018년에 비지니스 파트너 뿐 아니라 사회공동체와 임직원과 사회 발전을 위한 공생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주체로서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임을 실천하겠다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선언하였다.
정치권에서도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지속발전을 기여하는 ‘사회적 가치’의 확산을 위한 입법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19대와 20대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연이어 발의하였다가 무산되긴 하였지만,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의 입법이 추진되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사회적 가치를 선도하는 공공기관의 역할’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명시하며 관련 정책을 집행해오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들이 앞장서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조합원들의 기부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겠다는 노사합의를 이루어냄에 따라 2017년부터 ‘공공상생연대기금재단’, ‘금융산업공익재단’, ‘우분투재단’, ‘희망씨 사단법인’ 등이 차례로 설립되어 다양한 연대활동을 활발히 실천해오고 있다.

 

사회적 가치의 시대적 배경

왜 우리 사회의 주요 주체들이 사회적 가치에 대해 높은 관심과 적극적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다름 아니라 사회 해체라는 심대한 위기 징후에 대한 공통의 뭍제의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 우리 사회에 재산과 소득 그리고 고용지위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구조가 날로 심화되는 가운데 국민 소득 3만불 시대에 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 그리고 영세자영업자 등으로 구성된 사회취약계층의 삶은 열심히 일해도 여전히 고단하고 각박하기만 하다. 또한, 어렵사리 대학공부까지 마친 많은 청년들은 바라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알바 또는 열정노동으로 전전하며 그들의 암울한 미래에 좌절하여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한 ‘N포세대’로 자조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옥 같은‘헬조선’이라 신랄하게 성토하기도 한다. 격차와 차별로 고착화된 사회적 균열 위에 성별과 세대 그리고 이념에 따라 나누어진 사회집단들 사이에 험악한 혐오와 갈등이 뜨겁게 표출되고 있으며, 이에 더하여 국가와 사회공동체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각자도생’의 대중적 정서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것을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심각한 위기징후가 자리잡게 된 배경을 좀더 살펴보자면 그 문제의 발원으로 개발연대부터 민주화를 거쳐 신자유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경제성장과 시장경쟁력을 최우선시하며 줄곧 경제적 가치에 매몰되어온 국정기조와 지배담론에 의해 사회적 가치가 철저히 외면당하고 냉대받아온 지난 6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이  시동되었던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세계의 최빈국에 속했던 만큼 배불리 살아보자는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여 경제적 가치에 ‘올인’하듯이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자들 모두 다함께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의 국가적 특수상황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뤄내며 배곯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시대의 국가경쟁력을 명분 삼아 끊임없이 ‘비즈니스 프렌드리business friendly’경제여건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가치는 여전히 뒷전에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성장과 경쟁력 및 효율성을 중심 원리로 삼는 경제적 가치는 우리의 일상에 고스란히 배어들어 학교 교육의 입시성적경쟁에서부터 시작해서 청년기의 취업경쟁 그리고 일터에서의 실적경쟁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 전쟁 치르듯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의 가치규범을 수용하기 보다 적자생존의 개체화된 생활태도를 손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 상생을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를 소홀히 해온 만큼 불평등과 양극화, 차별과 배제, 혐오와 갈등 등과 같은 엄중한 사회 문제들을 켜켜이 마주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경제의 활력과 지속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로 작용하고 있음을 두루 확인케 된다.

 

사회적 가치의 구성요소

따라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을 복원하고 포용적인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균형추를 맞춰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더 이상 경제만 중요한 게 아니라 경제와 더불어 사회도 함께 중요시하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사회적 가치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그동안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논의가 활발한 반면, 사회적 가치가 무엇을 지칭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국내외의 연구자와 정책입안자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어 왔다. 그런 가운데, 국내 정치권에서 입법 발의한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에서는 사회적 가치의 세부적인 구성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예시하고 있다:

•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기본 권리로서 인권의 보호
• 재난과 사고로부터 안전한 근로・생활환경의 유지
• 건강한 생활이 가능한 보건복지의 제공
• 노동권의 보장과 근로조건의 향상
•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회제공과 사회통합
• 대기업, 중소기업 간의 상생과 협력
• 품위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
• 지역사회 활성화와 공동체 복원
• 경제활동을 통한 이익이 지역에 순환되는 지역경제 공헌
• 윤리적 생산과 유통을 포함한 기업의 자발적인 사회적 책임 이행
• 환경의 지속가능성 보전
• 시민적 권리로서 민주적 의사결정과 참여의 실현
• 그 밖에 공동체의 이익실현과 공공성 강화

사회적 가치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면, (1) 해당 조직에 속한 근로자들의 기본 권리(예: 인권 보호, 안전 일터, 노동건강, 노동권 및 경영참여)를 보장하는 것, (2) 조직 밖의 대사회적 책무(예: 원하청 협력, 양질 일자리 창출, 지역공동체 활성화와 지역경제 선순환, 윤리경영, 환경 보호 및 공공성 강화)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가치의 구성항목들은 비단 공공기관에만 해당된다기 보다 민간기업이나 비정부NGO·비영리NPO단체에 대해서도 구별 없이 적용될 수 있다. 이때,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의 경우에는 그동안 사업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공헌하거나 기부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사업활동의 수행과정에 있어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SK와 포스코의 새로운 경영이념이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경영방침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할 만하다. 아울러, 2008년에 참여연대가 노동분야에서 기업들이 실천해야 할 사회적 책임으로서 다음의 10개 항목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는데, 시민사회 차원에서 중요시하는 핵심적인 노동가치의 항목들인 만큼 유의하여 살펴볼필요 있겠다: ① 가족친화, ② 노동생활 질, ③ 차별금지, ④ 양질 일자리, ⑤ 사람 투자와 존중, ⑥ 법·인권 존중, ⑦ 건강과 안전, ⑧ 건전한 노사관계, ⑨ 노동참여 경영, ⑩ 지역사회 배려.

 

노동조합의 사회적 가치

정부 및 정치권이 국가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한 공익성을 추구하는 것이나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CSR과 공유가치Creating Shared Value, CSV를 실천하는 행동규범에 대해서는 그 필요성이나 추진전략 등을 다루는 논의가 활발한 반면,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이나 가치활동에 대한 연구는 그리 흔치 않다. 물론, 민주화 이후에 노동조합들이 노동자계층들의 권익 대변을 위한 정책적 요구를 제기하는 사회개혁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으며,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인 ISO26000의 제정이 추진되던 시기에는 LG전자 등의 일부 사업장에서 노조의 사회적 책임Union Social Responsibility, USR을 표방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보건의료노조와 SK Hynix노동조합이 나서서 각각 비정규직과의 차별해소와 하청업체와의 임금공유를 실천하려는 상생적 연대의 노사협약을 합의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노동조합들이 기업별 노조체계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며 조직 내부자인 조합원들의 권익 개선에만 열중할 뿐 노조 밖에 놓인 취약노동자들의 형편에는 무관심하거나 모른 채 하는 경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노동조합들이 비정규직이나 하청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이나 청년들의 구직난문제를 방치한 채 조합원들의 실리, 즉 그들의 일고용안정과 임금인상에 주력하는 활동에만 매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직-미조직 노동자들간의 격차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데에 방조하여 연대성 위기의 나락에 빠져들었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결사체라는 점에서 권익 대변과 보호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상이한 활동성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실제 여러나라의 노조활동을 두루 살펴보면, 조합원들의 권익대변에만 치중하는 실리주의적 노조운동에서부터 조합원여부에 관계없이 노동자계층 전반의 권익보호를 지향하는 사회개혁적 노조운동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지난 1990년말부터 산업별 조직체계로의 전환이 활발하게 진행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기업별 노조활동의 관행이 지배적이다보니 아무래도 조합원들의 이익대변에 차중하는 실리주의적 경향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노동시장 양극화에 대한 노조 내부의 성찰이 이뤄지면서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포괄하여 대변하려는 초기업적 교섭을 추진하거나 취약노동계층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강구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에 나서는 것에 대해 그나마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노조의 전향적인 움직임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최근 수년 동안에는 노동조합들이 사회취약계층을 보듬어 돕기 위한 사회연대기금의 설립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이 특기영할 만하다. 양노총의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박근혜정부 시절에 추진되었던 성과연봉제가 문재인 정부에 의해 폐기됨에 따라 당시 지급받은 인센티브를 자발적으로 출연하여 2017년말에 설립한 공공상생연대기금재단을 대표적인 예로 손꼽을 수 있다. 공공상생연대기금은 공공기관의 노사가 기부한 기금을 활용하여 청년 공익활동가의 생활안전망 구축, 직장갑질 해소, 방송분야 노동인권 개선, 중소기업 노동자의 작업복 세탁소 운영, 미혼모의 자활커뮤니티센터 설립 등과 같이 사회 약자들을 돌보는 공익단체들의 활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출연한 공공기관과의 파트너사업으로 철도역사 어린이집 조성, 소셜벤처허브 설립, 청년 공익활동가의 희망일자리 만들기, 해운항만산업 창업아지트 조성, 그리고 아파트형 사회적 협동조합 운영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아울러, 이 재단은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본인 및 자녀 교육을 위한 장학사업을 실시하였고, 미래세대인 대학생들이 상생과 연대의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대학동아리활동을 선발하여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으며, 공공기관 노사 및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공공부문의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대안을 모색하는 정례 연구포럼을 운영해오고 있다. 사무금융 노조들이 동참하여 2018년에 설립한 우분투재단은 노사합의로 조성된 기금을 활용하여 비정규직의 차별해소와 정규직 전환 그리고 비정규직·청년들의 금융지원 등으로 노동취약집단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실천해오고 있다. 희망연대노조가 주도하여 2013년에 설립한 희망씨 사단법인은 노조와 함께 지역공동체의 활성화와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의 자활 및 교육 지원 등을 통해 노동자와 주민들이 더불어 나눔과 연대의 생활문화를 만들어가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또한, 2017년 금융노조의 산별협약에 따라 설립된 금융산업공익재단은 노사 공동 운영이라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갖추며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 해소, 취약계층 지원 등의 여러 사회공헌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노조들이 조직 밖의 취약계층을 돕기 위한 연대기금을 조성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것에 대해 기업의 사회공헌과 비슷하게 사회 약자들에 대한 시혜적인 활동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물론, 노동조합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단체교섭을 초기업적으로 접근하여, 그리고 사회적 대화를 통한 정책협의에 의해서 미조직 취약계층을 포용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본연의 활동방식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착한 기부와 노조의 여유자원을 활용하여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특히 국가의 행정력이 손닿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빈자리에 대해 노조들의 연대기금이 따뜻한 손길로 지원하는 것은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노동조합의 유의미한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격차와 차별을 치유함에 있어 노동조합이 사업장 안팎으로 비정규직 남용과 원하청 불공정거래 등과 같은 회사의 비정상적인 경영방식을 감시-견제하는 파수꾼watchdog으로서, 하청업체 노동자들와의 임금 공유와 구직난의 청년들에 대한 일자리나누기 등을 통한 상생적 실천의 본보기로서, 그리고 ‘하후상박’의 연대임금교섭과 근로복지기금의 공동 활용 등을 통해 노동시장 양극화의 해소를 책임지는 사회연대의 구심점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사회적 가치가 튼실히 존중받는 시대적인 변화를 선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