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적 대전환과 포스코의 도전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
기업시민포럼 Society 분과장

 

기업시민 포스코 5년 스토리북 추천사 (☞ 원문보기)

2023년 7월 24일 개최된 ‘기업시민 선포 5주년 기념식’에서 필자는 감회가 새로웠다. 임직원들의 마음의 색채와 눈빛으로 보건대, 이젠 무언가 해낼 것이란 각오가 읽혔다. 자신의 업무가 공익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자각한 혁신 아이디어 경연은 그야말로 시민 정신의 파노라마였다. 시민성은 동물계에서 인류만이 갖고 있는 영성과 같은 것이다. 동반, 우애같은 상호 호혜(Reciprocity)가 없었다면 인류는 지구상에서 일찍이 소멸했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시민윤리를 세상을 지탱하는 현대 종교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날 경연은 시민윤리(Civic Ethics)의 축제였다. 그런데, ‘너는 무엇을 했는가?’ 필자는 갑작스레 떠오른 질문에 답하기가 궁색했다. 글을 쓰고 세상일을 걱정한 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글이란 지식인의 현실 참여라고 애써 위로해 보았지만, 글의 영향력이 날로 쇠락하는 현실 앞에서 더욱 궁색했다.

사실 필자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평생 해온 학문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문명 전환! 식자들이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흘려듣는 이도 있겠지만, 21세기가 성큼 내 일상 영역 내부로 들어와 위용을 뽐내고 있음을 실감한다. 후세 문명사가들이 ‘거대한 변혁’이라고 명명한 1920년대의 지식인들도 그런 예감에 떨었는데, 이들은 1950년대까지 예고 없이 닥쳐온 거대한 변동을 감당하느라 모든 지혜를 동원해야 했다. 그것은 미증유의 거대 물결이었기에 강대국들조차 대응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 파도는 더욱 거세다. 필자는 21세기를 ‘과학 독주의 시대’로 규정한다. 눈부시게 발전한 20세기 과학 문명은 어쨌거나 인간의 통제 범위 내에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21세기 디지털 문명과 AI 첨단 과학은 통제 가능한가? 대체로 부정적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과학이 인간을 떠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문명사가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호모데우스> 2022년 개정판 서문에서 이에 대한 심정을 호소한다.

 

“무엇보다 인류는 생태 위기에 대처할 능력,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폭발적 잠재력을 규제할 힘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경쟁하는 집단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동시에, 붕괴하는 생물권에 적응하고 점점 발전하는 아바타, 사이보그, 외계 지능을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인류라는 종(種)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두렵지 않은가? 독주하는 21세기 문명에서 인류 멸절의 개연성을 상상해보는 일조차 두렵다. ‘과학이 인간을 떠나고 있다.’ 문명이란 인류 멸절의 요소들이 아니라 인류 생활의 풍요와 안전, 인본주의적 가치의 실현을 지칭하는 진취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통제를 벗어난 과학의 고삐를 다잡는 힘이 중요하다. 폭발적 잠재력을 규제할 힘, 경쟁하는 집단에 인류 생존과 번영의 가치를 심어줄 역량은 어디서 나오는가? 공감(Sympathy)과 동정(Compassion), 두 개의 샘물이다. 이 두 개의 샘물로부터 솟아 나오는 정서적 연대와 이성적 판단이 기업과 합류할 때 ‘기업시민’이 탄생한다. 포스코가 새로이 개척한 경영이념인 기업시민이 문명사적 개념이자 인류사적 명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필자는 다소 평상심을 찾았다.

지난 5년간 포스코는 기업시민의 새로운 기치 아래 문명 전환의 이점 극대화와 폐해 최소화를 향한 혁신의 길을 걸었다. 포스코의 멈추지 않는 혁신은 인류 생활의 문법을 뒤바꾼 문명 전환에 대한 포스코의 응전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21세기 문명의 법칙은 20세기의 지혜로는 전혀 예측 불가능하다고 문명사가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산업의 중심이 디지털과 ICT로 이동하면서 제조업의 혁신 경쟁 구도가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제조업에 디지털 또는 ICT를 접목하는 것, AI와 로봇 기술을 융합해 거듭나지 않으면 곧바로 퇴출 위기에 직면한다.

 

여기에 지난 3년간 세계를 휩쓴 팬데믹의 충격이 세계화의 지도를 바꾸어놓았다. 글로벌 기업들은 미증유의 파고를 헤쳐나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았다. 길게 보면 인류 문명은 부드러운 상승 곡선처럼 진화하는 듯 보이지만, 혁신은 사실상 과거의 패러다임을 깨고 단절적 수직 상승을 구가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일찍이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진화를 적자생존으로 설명했는데, 생존의 핵심은 ‘변이(Modification)’다. 변이가 바로 혁신이다. 기존 법칙과 전혀 다른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별개의 종(種)이 탄생하는 것이다.

포스코는 이제 별개의 종이 됐다. 문명의 이점을 최대화하는 혁신을 거듭하는 별종(別種), 최고경영진과 임직원들이 바친 눈물겨운 헌신과 노력의 결집이자 기업시민의 소중한 결실이다. 기업시민은 문명 대변혁에 응하는 포스코 함대의 우렁찬 고동 소리였다. 21세기 자본주의는 지난 세기의 그것이 아니다. 상품생산과 시장 구조가 바뀌었고, 생산과 유통의 목표와 가치도 수정해야 한다는 세기적 명법(命法)에 포스코는 기업시민이란 경영이념으로 화답했다.

생산, 소비, 시장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이익 극대화로부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전환했다. 여기에 기업이 준수해야 하는 인류의 명령이 부가됐다. 이른바 ESG가 모든 기업 활동의 뉴 노멀로 명시된 것이다. 상품생산 그 자체가 인류의 서식지인 지구를 온전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것(Environmental), 기업 활동이사회적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Social), 이를 위해 지배구조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것(Governance)이 그것이다. 글로벌 기업을 감시하는 국제기구가 이미 만들어졌고, 2025년에는 ESG 수치를 기준으로 기업의 생존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는 시간대를 앞두고 있다.

 

E(환경), S(사회), G(지배구조)를 일대 변혁하라는 지구촌의 외압은 글로벌 기업의 명줄을 죌 만큼 거세다. 유럽연합(EU)은 4만9,000개 기업의 ESG 성과 정보에 따라 세금 차별 부과 방침을 공시했고, 영국 역시 대기업의 기후 관련 재정을 재무제표에 공개하도록 명시했다. 유럽에서 내연 자동차의 생산과 수입은 곧 중단된다. 포스코는 ESG 대열에 앞장서 이미 탄소 제로(Net Zero) 선언에 동참했으며, 수소경제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분명 야심차면서도 힘든 도전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변혁의 중심에 ‘기업시민’이 있다. 5년 전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최정우 회장의 결단이었다. 포스코에 내재된 유전자를 바꾸는 것은 바로 21세기적 체질 개선에 해당한다. 기업시민 개념은 2002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전 세계 34개 대기업이 참여한 ‘Global Corporate Citizenship’이라는 공동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업시민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관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고 한다면, 포스코에 의해 ‘고유명사’로 변한 것은 어찌 보면 세기적 사건이다. 그 자체를 경영이념으로 채택한 것은 포스코가 최초다. 이른바 ‘기업시민 포스코’다.

포스코의 임직원은 50년간 배양한 전통적 유전자인 수직적 시선을 수평적 각도로 전환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과 사회로 시선이 이동하자 공감(Sympathy)과 동정(Compassion)이 새로운 유전자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과학 독주의 폐단을 통제하는 힘이자 공유경제, 인류애적 공동체를 만드는 역량과 지혜가 여기서 나온다. 기업시민은 여기에 ‘아웃워드 마인드셋(Outward Mindset), 협력적 소통, 실천 의지(Go the Extra Mile)’를 접합해 획기적인 별종을 생산하는 중이다.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래 이상이던 재생산, 상호 호혜, 재분배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문명의 총아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임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온 5년간의 노력과 이에 대한 결실이 바로 <기업시민 포스코 5년 스토리북>이다. 자신이 스스로 행했지만 그 의미를 몰랐던 행위들의 정체와 실체가 타인들의 발자취와 고백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을 것이다. 필자가 ‘기업시민 5주년 기념식’에서 자문(自問)했듯, ‘나는 공동체적 우애를 실천하는 데 가담한 적이 있는가?’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기업시민을 향한 임직원들의 소중한 흔적을 따라가 보면서 필자도 자기 검열을 하리라는 예감이 든다.